그런 저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온전히 서서 걷기 힘들 만큼 바람이 거세게 불었어요. 날씨가 좋았다면 귤 따기 체험도 하고, 해안도로에 차를 세워둔 채 걷고 싶은 만큼 마음껏 걷고, 멋진 인생샷도 많이 건졌을 텐데 날씨가 좋지 않으니 즐길거리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죠.
게다가 결항까지 되어버리니 저는 꽤 당황스러웠어요. 갑자기 회사에 연차를 이틀이나 더 내야 할지 모르는 상황도 부담이었지만, 무엇보다 저는 저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능통하지 못한 사람이거든요. 숙소도 갑자기 하루 더 연장을 해야 했고, 딱 3박 4일 치만 챙겨 온 옷과 생필품들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어요. 우선 회사에 저의 소식을 알렸는데, 저를 잘 아는 한 동료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저를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어요.
"수진님의 틀을 깨는 챌린지라고 생각해 봐요"
생각해 보면 제 아무리 걱정을 한다고 한들 강풍을 뚫고 비행기가 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결항 때문에 불편한 건 고작 숙소를 연장하고, 입었던 옷들을 며칠 더 입고, 부족한 생필품 없이 이틀을 버티는 것뿐이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 '챌린지'가 꽤 쉽게 느껴졌고 어느 정도 안정감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다행히도 결항이 된 그날 저녁, 항공사에서 다음날 대체편을 준비했다는 연락을 주었고, 다음날마저 몇몇 결항이 된 비행기 편들 사이에서 저는 안전하게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거 봐요. 내가 여행 취소하라고 했잖아요"
제가 날씨 때문에 여행을 취소할까 말까 고민할 때, 여행을 취소하라고 권유했던 분이 말했어요. 4박 5일 내내 강풍이 부는 제주도에 갇혀 있었다고 하니 '망한 여행'이라고 생각한 거죠. 어쩌면 저 역시 이런 '망한 여행'을 피하려고 숙소와 비행기 편 예약을 번복해 가며 고민을 했던 거겠죠.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저는 하나도 아쉽지가 않았어요. 오히려 생각지 못한 길로 흘러갔던 상황들이 재미있었달까요. 큰 변함없는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도 모든 것들이 계획된 대로만 흘러갔다면, 이번 여행처럼 즐겁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주도에 수없이 많이 가봤지만, 저는 이번의 제주를 특히 잊지 못할 거예요. 귤 따기 체험을 하러 갔다가 체험을 할 수 없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간 카페에서 만난 고양이 '토리', 가급적 실내에서 시간을 보내려 간 산방산 탄산온천에서의 인생 첫 온천 경험, 집 근처 귤 가게가 문을 닫아 운전중 우연히 멈춰 선 한 가게에서 만난 호탕한 주인아주머니와의 대화, 평생 맞아본 바람 중 가장 센 강풍을 뚫으며 깔깔깔 웃어댔던 시간들이 모두 나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덕분에 만난 소중한 기억들이 될 테니까요.
가끔씩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그날의 제주가 많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