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나?'라는 생각에 도망치듯 진료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주사실에서 주사를 맞으며 생각해 보니 제가 진료실에 앉아 있었던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의사든 간호조무사든 저에게 소리를 지를 이유도, 권리도 없었고요. 고백하자면, 저는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무던하게 넘기는 성격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날은 말 한마디 꺼내기도 힘들 정도로 너무 아팠어요. 갑자기 40년은 훅 나이 든, 노인이 된 것만 같았죠. 당장은 제 몸부터 어찌해야 했으니, 접수처에 가서 수액을 놔달라고 말했습니다.
저에게 수액을 놔주던 간호사는, 방금 있었던 제 이야기를 듣고는 '아이고, 그러면 안 됐는데...' 하며, 제 손이 너무 차다고 손 주위를 몇 번이나 어루만져주고 '핫팩을 가져다 드릴까요' 하며 제 상태를 몇 번이고 체크해 주었습니다. 한 병원에서 누군가는 환자를 치료해 주었고, 누군가는 환자에게 주사와 처방전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요? 저는 '직업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의식이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특유한 태도나 도덕관, 가치관 따위를 이르는 말입니다. 같은 직업을 갖고 있어도, 그 일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저는 학교와 직장을 오가느라 버스를 자주 이용했는데요. 버스 기사님들 중엔 승객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며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셨지만, 배차 간격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는 버스 기사님들도 많았습니다. 승객이 다 내리기도 전에 문을 닫아버리거나 왜 이렇게 굼뜨게 움직이냐고 소리를 지르곤 했어요. 그나마 젊고 건강한 청년들은 빠르게 버스를 타고 내릴 수 있지만,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이유도 없이 눈칫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제가 승용차를 갖게 된 이후 가장 좋은 점은, 대중교통을 타면서 눈칫밥을 먹지 않게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일을 하다 보면 힘든 날도 있고, 남들은 다 알지 못하는 그 직업만의 고충도 있겠지요. 작가인 저라고 해서 365일 직업의식을 갖고 살 수는 없듯이 말이죠. 저라고 해서 대단한 직업의식을 가진 건 아닙니다. 매주 귀찮음과 싸우며 글을 씁니다. 정말 내가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부끄러운 날도 많지요. 그럼에도 작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아쉬움은 느낄지언정, 단 한 번도 대충 쓴 글을 발행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 주는 이렇게 때워야지,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게 제가 작가로서 가지는 최소한의 직업의식이자 독자 분들께 지키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약을 먹고 하루 푹 쉬었더니 이제 감기가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 의사가 명의였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않을 거예요. 지인들에게도 추천하지 않을 겁니다. 내 가족이 아플 때 그런 대우를 받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한 가지는 반드시 믿고 싶습니다. 세상엔 환자를 진심으로 대하는 의료인이 훨씬 더 많다고. 그런 대우를 받지 않고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넘쳐날 거라고. |